언젠가 설교 말씀 중 인용하셨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은 기술>이라는 책은 ‘사랑’을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실행의 언어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겠죠.
따뜻한 손으로 서로의 몸을 어루만져야 에로스가 되고, 울고 웃으며 어깨동무하고 등을 토닥여야 필리아도 되고, 땅을 일궈 아이들 입에 밥을 넣어줘야 스토르게도 되는 것처럼요.
아가페도 그럴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보이는 하나님을 찾아 감으로써 그 의미가 완성될 것입니다. 마태복음25 장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네요. 우리의 사랑이 교회 안에서 주님만 사랑합니다를 고백하는게 아니라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요.
그렇지만 그 사랑이 단지 구제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창세기 창조설화를 과학적으로만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창조가 근원이 된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생기를 불어 넣어 모든 만물을 살아 있게 만드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또는 우리의 익숙한 언어로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그‘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힘을 쏟아야 하겠죠.
또한 ‘생명’은 죽고 사는 문제만이 아닌 그 ‘권리’에 관한 모든 것이 포함되겠죠. 땅과 바다를 위시한 자연도 마찬가지구요.
넷플릭스에 <TAKE 1>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성악가 조수미 편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음악을 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고, 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면 자기가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도 ‘사랑하라’는 말보다 ‘안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알아야 한다’는 명제에는 알고 나서 무엇을 한다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 하는 것이 별개가아니라 하나인 것 인거죠. “네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네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작은 목소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내게 전해줍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미심쩍어 더 확실히 알 때까지 미뤄두기도 하고 또는 그냥 못들은 척 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작은 목소리는 더욱 희미해지고 나중에 들려오는 세상의 큰 목소리에 묻혀 버립니다.
이렇게 나의 몸은 나의 생각보다 늘 뒤쳐지고 결국에는 따라잡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죠. 그래서일까, 신영복 선생님은 머리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세상에서가장 먼 여행이라고 말씀하셨네요.
다시, 사랑이 기술이라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강의실에만 앉아 머리로 알고 노트에 적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죠. 실습이 필요합니다. 몰랐던 것이든 조금알던 것이든 실천을 통해 더 확실히 알게 되기도 하고 또 잘 알았던 것을 실제로 현장에 적용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은,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교 지침이 아니라 기독교의 사랑은 바로 두 손과 두 발에 있음을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