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명을 받은 병사가 한 손에 든 칼로 당장이라도 반쪽을 내려는 듯 아이의 발목을 움켜잡고 거꾸로 쳐들고 있습니다. 어느칼럼을 읽다가 보게 된 그림인데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솔로몬의 재판 장면을 17세기 바로크 화가 루벤스가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 속 그 아이를 보다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몸서리칩니다.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왕을 보며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라고 손짓을 하고 있고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어서 반으로 나누라며 부추기는 듯합니다.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어느 변호사는 최근 출판한 그의 책에서 이 솔로몬의 재판에 대해 전혀 지혜롭지 않은 판결이라고 말합니다. 그 뿐 아니라 또 다른 법률가들 또한 그와 같은 반론을 펴고 있는 것 같은데 즉, 아동학대, 인권에 대한 공감능력 부족 그리고 협박죄 등, 그리고 아이의 진짜 엄마를 밝힐 수 있는 다른 많은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반으로 나눠 주라는 편의주의적인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막상 그 두 여인이 왕의 판결대로 하자고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 지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 판결 덕분에 아이의 진짜 엄마는 밝혀졌고 왕의 지혜는 후세에까지 전해지고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왕을 꼽으라면 단연 다윗 왕을 으뜸으로 칠 것 같은데 아마 그의 일생을 통해 보여지는 풍부한 서사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솔로몬 왕도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훌륭했던 왕 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누린 부귀영화는 그의 지혜(이원론적 선악을 구분하는)에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 지혜문학(잠언, 전도, 욥기, 집회서, 지혜서)의 결론이라 하고 반면에 모두가 그 지혜를 찬양할 때 창세기 3장을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궁정학자는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솔로몬이 누리는 부귀영화가 민족을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곧 이원론(이분법)을 극복하고 선악의 피안에 이르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재판에서 보여지는 또 한가지는 진짜 엄마를 통해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친모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생명을 살리려는 그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귀하며 칭송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그 궁극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생명엔 관심없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라도 차지하겠다는 가짜 엄마의 모습이 여기저기 넘쳐납니다. 오랜 시간 축적해온 자신 또 그들만의 기득권과 권력, 그리고 사리사욕을 위해 어서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는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의 부추김이 은밀한 속삭임이 아니라 대놓고 내뱉는 뻔뻔함으로 나라를 국민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혐오, 배척, 그리고 맹종등의 광기로 망언을 일삼고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이 얘기하는 이원론과는 또 다른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나누는 편가르기일 뿐일 것입니다.
헬라철학(문화)의 이원론(이분법)이 들어있는 대표적 지혜문학인 <잠언>에서도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1:7 상반절, 공동번역)라는 말씀으로 이원론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오늘 보고 듣는 것은 정치나 학계 또 종교계를 막론하고 터져 나오는 극단적 분열조장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경계를 허물고 하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우리도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을 새겨 사람을 나누는(divide)삶이 아닌 사랑을 나누는(share)는 삶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