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주신 말씀 자료를 두 번 읽고 언젠가 토요일 새벽예배에서 저도 욥에 관한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어 저장되어 있던 글을 찾아 또 두 번 읽어 보았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고 누군가 얘기했듯이 독후감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성경이해의 부족함이야 차치하더라도 감정 과잉에 상투적 표현들까지 뒤범벅이죠. 그리고 관념에 사로잡힌 말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의 본문을 갖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그 부분을 읽었을 때는 크신 하나님앞에 티끌보다도 작은 존재인 나를, 그리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나의 교만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 들려온다고 말했습니다.
내 안에 가득차 있는 <나>를 (자아 또는 아상으로 표현하면서) 비워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더군요. 그러면서도 또다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나>로 나를 채우는 삶이 되돌아 올 것을 알기에 부단히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했네요.
어둠은 없어지지 않고 빛이 물러난 그 자리에 언제나 있던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듯 저도 마찬가지죠. 교만뿐인가요 시기, 미움, 질투, 혐오, 욕심, 게으름, 낙담, 절망, 무지, 거짓, 위선, 허영 등등 이제는 식상해서 무감각해진 온갖 <나>들로 똘똘 뭉쳐 있는데 나를 온전히 비운다는 것은 저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Integrity’는 더욱 말할 것도 없죠.
나를 비워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신다는 말이 요즘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구체화 되는 것 같습니다. 실에 푸른 물이 드는 것을 보고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묵자가 말했다는군요. “물감에 따라 실의 색이 달라지니 신중할 수 밖에 없겠다. 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은 더 그렇겠구나”(묵비사염). 현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문득문득 정신이 들 때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저의 마음’을 물들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밖에요.
영원히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나>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물들이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야겠지요. 물든 실이야 오래 가겠지만 물든 사람의 마음은 쉽게 그 물이 빠질테니까요. 그나마 잠깐 정신이 들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물들어질 때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어 가고 또 열심히 그 <마음>을세상 속으로 실어 나가야겠구요.
그러려면 이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