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샘에서 ‘사명’의 뜻을 찾아 보니 ‘맡겨진 임무’라고 되어 있네요. 아마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말의 무게 때문인지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왠지 큰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도 듭니다. 어느 경우에는 말의 덫에 갇혀 경직된 해석을 하게 되는 일도있구요. 그러다보니 일상의 삶 속에서 그 ‘말’은 설 자리를 잃게 되기도 하네요.
요즘 성경을 읽는 세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말’ 혹은 ‘문자’에 갇혀 읽지 않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하나님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다고 성전 밀실에서 영원히 사시라고 했네요. 이렇게 하나님을 어두운 곳에 유폐시켜 놓고 세상 부귀영화를 독차지했구요.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쓰여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어둠이 깊은 물위에 뒤덮혀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영)이 휘돌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네요. 노예생활 가운데 시커멓게 타들어간 그들의 심정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둘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기입니다. 간혹 성경 속 인물들에 대해서 너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앞의 솔로몬처럼 허물도 하나님의 사람임을 돋보이게 하려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유폐시켰다’, ‘독차지했다’ 라고 말하면 너무 심한 거구요.
그리고 셋은 알레고리적 해석을 되도록 하지 않는 겁니다. 히브리어나 고대 근동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하려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뿐더러 그냥 담담하게 읽어보려는 겁니다. 성경 특히 신약에 있어서 그 청자를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그 말씀을 들은 초대교회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로 현재까지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말씀을 듣는 우리들로 나누면서, 초대교회를 지나면서부터 그 말씀을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 그러한 경향은 더욱 늘어났다고 하네요.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말씀을 사명을 진취적으로 찾아가는 여정으로 해석하여 그 ‘사명’에 소극적인 현대 교인들을 독려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앞의 잃은 양부터, 은전 그리고 아들까지 연결하여 15장 1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세리와 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또 잃었던 것을 회복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곰곰 생각하게 되네요.
살라는 명령, ‘생명’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단상을 적어 본 글을 몇 년 전 교회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같이 보내 드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