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여년 전, 전면 무상급식 논란으로 한국 사회가 뜨거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무상급식에 대한 논의의 시작과 그 내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왜 부자들한테도 공짜로 밥을 주냐는 것이었습니다. 선별 복지론이죠.
저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내심 재벌 자녀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생각했습니다. 밥 앞에서 평등한 사회가 되는 거죠. 그 밥을 먹는 자녀를 칭찬할 일이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부모도 칭찬받을 일이죠. 참 교육이라 할 수도 있겠구요.
엊그제 신문에서 생활고로 세상을 등진 신촌 모녀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생활고로 극단 선택을 했다는 뉴스는 넘쳐납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아니, 그 전에도 많았을 이런 아픔들 이후로도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하늘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아무 걱정없이 끼니를 이어가죠. 그런데 뉴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네요. 세상에는 일용할 양식을 받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눈물 어린 호소이겠죠.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하늘의 만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라고 하는 <거룩한 부담>일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떡’과 ‘말씀’은 같이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은 육의 것으로 전해 주신 말씀은 영의 것으로 둘이면서 하나인 하나님이죠.
이렇듯 영과 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거죠. 땅을 부정하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은 창조의 의미에도 맞지 않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위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을 부정하는 일도 되겠죠.
그러므로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바라보느냐”는 예수님의 책망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유효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만 소망할 것이 아니라 보이는 천국을 위해서도 믿음이 나아 가야겠습니다.
<거룩한 부담>은 물질적 나눔에서부터 시작되겠지만 차츰 그 지경을 넓혀 ‘일용할 양식’이 단지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닌 이 땅 위에 세워야 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는 고민으로 이어져야 하겠죠. 그 고민의 바탕 위에서 교회에서 계획되고 행해지는 모든 일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기를 기도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