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속회때 노벨문학상 얘기가 나와서 제가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약 2주일 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난 후 국내외 언론에서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원서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어느 감격 어린 독자의 댓글처럼 저도 흥분된 마음으로 관련 기사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이 큰 사고 쳤다는 그 부친의 말처럼 예상을 뒤엎은 수상 작가의 면면들이 일거에 세상에 드러나는 바람에 고작 이름 정도 알고 십수년 전에 그의 소설 한 두 권 읽어본 것 밖에 없는 저에게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아주 잘 알고 지낸 사람같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상 작가 관련 소식 외에 번역에 관한 소식도 그에 못지 않게 많았습니다. 번번히 수상 문턱에서 고배를 마실 때마다 늘상 한국어를 외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번역의 문제를 수상 실패의 첫 번째 원인으로 지목해 왔었는데 마침내 그 벽을 깼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번역 하면 빠질 수 없는 오역에 관한 비판 글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작가의 좋은 작품을 세상의 모든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밤을 새워 고심하며 의견을 나누고 관련 공부를 하며 노력해 온 번역가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기사도 꽤나 많았습니다. 이런 기사들을 읽던 중에 갑자기 바벨탑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하늘 자리까지 넘보는 인간의 욕망에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 하신 사건에서 하나님의 벌이 아닌 축복을 생각했습니다. 말이 같아서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통하고 공부하며 노력을 했을까, 익숙하기에 또 쉽게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문제에 귀를 기울였을까, 라는 생각에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가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속상한 일이다. 그들에게 이런 번역 붐은 일종의 축제다”(같은 책 p.280). 그러나 축복이 아니어도 축제가 아니어도 바벨탑 사건을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제부터 서로의 목소리에 세상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하나님의 당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로 이태원참사 2주기가 되었습니다. 일상의 안전이 담보되지 못하는 요즘 세상에서 잘 살아낼 수는 있을까 걱정하던 중에 며칠 전부터 그 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열린 행사와 그 곳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에 관한 기사를 보며 위로받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창1:31) 세상은 여전히 유효하며 ‘소년이 온다’를 읽고 영상으로 오월 그 날의 장면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거리감이 지워졌다는 어느 해외 독자의 말처럼 진심을 전달하고 나누고 위로하는 이들 덕분에 하나님 나라는 한걸음 더 가까이 우리에게 와 있는 것 같습니다.